인식론적 책무성이란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y)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아는지, 그 앎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다루는 철학의 한 분야입니다. 이 안에서 '인식적 책무성'(epistemic responsibility)은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아니라, 아는 과정 자체를 얼마나 성실하고 신중하게 수행했는가를 묻는 개념입니다. 철학자 로레인 코드는 1987년 저서 《인식적 책무성》에서 이를 "잘 알아야 할 의무"로 정의하며, 지식은 고립된 개인이 홀로 도달하는 결과물이 아니라 여러 앎의 주체들이 사회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대화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봤습니다.
이 관점에서 앎을 잘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특정한 지적 성품, 이른바 '인식적 덕'이 요구됩니다. 주의 깊음, 지적 용기, 신중함, 정직함, 겸손함 같은 태도가 여기에 해당하며, 인식론자들은 이런 태도를 갖췄는지에 따라 한 사람의 앎이 얼마나 책임 있게 이뤄졌는지를 평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최근 철학계에서는 이 개념을 인공지능 시대에 맞게 다시 논의하고 있습니다. AI가 내놓는 답을 사람의 증언처럼 신뢰해도 되는지, 그 신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를 묻는 연구들입니다. 공통된 결론은, AI에게서 답을 얻더라도 그 답을 믿고 활용한 데 대한 책임은 여전히 사람에게 남는다는 것입니다. AI가 대신 생각해주더라도, 그 생각을 받아들이는 판단까지 AI에게 넘길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가짜 독서 시대, 문해력을 국가가 진단하다
지난주 한겨레는 생성형 AI가 만든 새로운 위험을 '가짜 독서'라는 말로 짚었습니다. EBS '당신의 문해력' 시리즈를 만든 민정홍 PD는 "인공지능은 독서를 하지 않아도 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며 이렇게 이름 붙였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5 국민 독서실태 조사'를 보면 지난 1년간 종이책을 1권 이상 읽은 성인은 28.8%로 역대 최저치였고, 종합 독서율도 2015년 67.4%에서 2025년 38.5%로 10년 새 절반 가까이 줄었습니다. 반면 교보문고 집계로는 '문해력'을 제목이나 부제에 넣은 신간이 2021년 105종에서 2025년 292종으로 꾸준히 늘었습니다. 책은 덜 읽으면서 문해력 책은 더 찾는 흐름입니다. 문해력 전문가인 조병영 한양대 교수는 예전엔 정보를 정확하게 처리하면 문해력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은 "이제 내가 읽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신뢰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능력이 문해력의 핵심이 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같은 주 교육부는 이 문제를 국가 차원에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초중고생의 AI 리터러시(문해력)를 국가 공통 기준으로 진단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며, AI 작동 원리 이해, 목적에 맞는 활용, 오류(환각) 검증, 책임 있는 사용까지를 진단 대상으로 삼습니다. 하반기 검사를 개발해 연말 전국 1,141개 AI 중점학교에서 시범 적용할 예정이며, 서울시교육청은 이미 약 3만 명을 대상으로 진단을 실시했습니다(결과는 절대평가 1·2·3 수준으로 9월 중순 공개 예정). 이 진단은 성취도 평가가 아니며 내신에도 반영되지 않습니다.